Selective Salvation. 선택적 구원

십자가는 죄사함이 아니다. 1 대속물은 없다

geun2 2025. 5. 29. 08:47

교회에서 듣지 못하는 깊은 창세기 내용은 다음카페 요기에.
2025년 예수 재림의 해

https://cafe.daum.net/good-horse/

 

십자가는 죄사함이 아니다. 1 대속물은 없다

 

* 유대교가 죄를 없애는 방법

 

야훼를 섬기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죄를 신의 뜻을 어긴 행위로 규정하며, 죄의 고백과 용서, 속죄 의식이 체계적으로 발전해 왔다. 물론 기독교도 이에 포함되지만, 여기서는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유대교에서는 개인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람을 대신하여 동물의 피를 바치는 방식으로 죄사함을 받는다.

대표적인 제사의 예는 다음과 같다.

 

1. 속죄제 – 부지중에(실수로) 하나님이 금하신 계명을 어겼거나, 개인 또는 공동체가 죄를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 죄인은 흠 없는 소, 양, 염소 또는 비둘기 등을 성소로 가져와 제물로 삼는다.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린다.

 

2. 속건제 –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에 대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나,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드리는 제사. 주로 흠 없는 숫양을 제물로 바치며,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린다. 이웃에게는 피해에 대한 배상과 함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갚는다.

 

3. 속죄일 제사 – 1년에 한 번,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드리는 특별한 제사. 대제사장이 자기 자신과 백성을 위해 수송아지와 숫염소를 속죄제물로 바친다.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려 성소와 백성을 정결하게 한다.

 

죄인이 제물을 성소로 가져오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직접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린다.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뿌리거나 제물의 일부를 불에 태운다.

 

동물의 희생을 통해 죄를 씻거나 신의 진노를 달래려는 제사는 고대 세계 여러 종교와 민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유대교처럼 죄를 동물에게 전가하여 대신 죽게 함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대속 개념이 명확하고, 제사 규정이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발전된 종교는 유대교가 유일하다.

 

히브리서 9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언약 체결과 성소 정결에서 피의 사용은 필수적 요소로 강조된다. 특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단언은, 율법 체계 안에서 죄 사함이 반드시 피의 수반을 필요로 했음을 명확히 규정한다. 이 구절은 죄의 정결뿐 아니라 언약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도 피가 핵심 매개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구약 종교 체계 전반에 걸쳐 피가 지닌 정결의 효력과 근본적 원리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글쓴이가 보기엔 야훼는 이상한 신이다.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는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기 위해 '세상 끝'에 나타났다. 대제사장은 해마다 제사를 반복하지만, 예수는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려 인류의 죄를 영원히 없앤 것이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반복이 필요 없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희생이라는 뜻이라고 전한다. 히브리서 저자도 이 정도면 아는 게 없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를 대속제물로 묘사하는 구절은 사울과 그 계열의 복음서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죄를 대신지는 대속제물이 아니다. 이러한 식의 기록은 결국 예수는 잘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

 

예수의 십자가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한 대속물이라고 착각하게 된 이유는, 예수가 살아 있을 때 죄사함을 받으라고 직접 말했기 때문이며, 유대 종교가 오랫동안 죄의 구속에 침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누구에게 죄 사함을 선언했는지 살펴보자.

대표적인 장면은, 예수가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하자 중풍병자가 일어난 사건이다.

또 누가복음 7장에는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죄인으로 묘사되며, 예수가 그녀의 죄를 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실제 죄인이 아니며 누가복음 저자가 그녀를 의도적으로 비하하며 서술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 기록은 제외해야 한다.

이제 남은 이야기인 간음한 여인의 사례를 살펴보자.

 

요한복음 8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녀를 비난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예수가 그녀의 죄를 사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녀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지만, 결국 여인은 돌아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주께 들었다.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가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며, 그가 흘린 피가 제단에 뿌려진 동물의 피를 대신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 죄란 없다.

 

천국의 아버지가 바라보는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은 살인, 도둑질, 성폭행, 모함, 폭력과 같은 행위적 범죄가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이것이 죄이니 너는 지옥에 간다고 판단할 기준 자체가 없다.

예를 들어 길을 다니는 수컷 고양이가 글쓴이의 손에서 밥을 받아먹는 암컷 고양이 세 마리와 교미해 새끼를 낳았다고 해서 그 수컷 고양이를 죄 고양이로 몰아 죽이진 않는다. 그저 이놈을 잡아 중성화 수술을 시켜야 하나 고민할 뿐이다.

 

천국의 아버지가 죄의 기준을 통해 인간을 평가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 죄의 기원.

 

그렇다면, 죄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로마서 5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지상을 창조한 엘로힘과 종교의 하나님 야훼가 기준을 정하기 전에는 죄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창세기에 따르면 홍수가 끝난 뒤 가장 먼저 선포된 법은 피를 흘리면 그 피를 돌려받는다는 것이었다.

엘로힘은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며 살인하는 존재가 되도록 유도했다. 살인한 자는 흘린 피에 대한 값을 반드시 치르게 된다고 말했다.

 

야훼는 십계명으로 시작되는 율법을 선포하며 이러한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죄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에서 라는 단어는 아담과 여자의 배신 장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가인에게 여호와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히브리어 원어 חַטָּאת(ḥaṭṭā’t, 하타트)와 그 동사형 חָטָא(ḥāṭā’, 하타)빗나가다”, “과녁을 놓치다”, “실수하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perplexity.ai는 전한다. , 얄다바오트에게 가인은 빗나간 화살과 같고, 가인은 자기 행위가 실수로 인식된 것이다.

 

죄는 지상을 다스리는 엘로힘과 야훼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먼저 엘로힘이 설정한 죄의 구속을 피하는 방법을, 야훼는 자기 백성에게 전한다. 그것이 바로 대속물 개념이며, 동물의 피를 대신 흘리게 하는 방식은 일종의 잔꾀에 해당한다. 이로 우리는 동물의 피를 흘리는 것이 인간에게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도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국 야훼는 엘로힘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자기 백성에게 가르쳐 그들을 자신의 구속력 아래 두고자 했다.

 

예수 이전에 등장한 세례 요한은 죄 사함을 외쳤다. 이는 야훼의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것으로, 자유인으로 인도할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신부가 단장하는 준비와 같다. 물론 이런 상징적 의미를 요한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울타리 안에 있는 양의 비유로 설명했다. 지상은 곧 혼의 감옥이다.

 

구원의 대상이 육이 아닌 혼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죄사함이라는 단어는 의미를 잃게 된다. 혼의 몸이 간음이나 도둑질을 저지를 수는 없으며, 그런 행위는 모두 육체의 작용일 뿐이다. 혼은 지식을 통해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출을 원한다면 목자가 이끄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주인이 자기 양을 찾으러 왔는데, 그 누가 토를 달수 있단 말인가.

 

예수에게 죄사함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다만 유대 율법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격을 주고, 그로 인해 깨달음을 유도하려는 표현일 뿐이다. 이는 곧 야훼의 신보다 더 높은 권위가 지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죄사함의 방법을 알리는 방식으로, 그들이 다시 이스라엘 민족으로 윤회했다. 이스라엘 혼은 다른 혼의 인간들보다 더 오래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엘로힘의 법에 해당하는 죄를 벌금처럼 치르고 죽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엘로힘이 심판할 근거 자체가 사라졌다는 말인데,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면 그는 훨씬 더 복잡한 법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하하하.

 

엘로힘을 섬기는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세에는 면죄부를 판매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교황이나 사제에게 부여해왔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권위가 고해성사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왜 죄사함에 관련된 행위나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예수의 피로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개신교를 이끄는 혼의 인간들은 이미 부활한 이스라엘 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부활한 144,000명이다. 계시록에 부활한 이스라엘 혼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저지른 악행에 대해 심판할 근거가 없다. 이들은 죽는 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야훼는 지구에서 그를 섬기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한 이스라엘 혼들과 함께 얄다바오트의 하늘에 이르기를 소망했다.

 

* 예수의 가르침.

 

만일 죄사함이 예수에게 구원의 핵심 과제였다면, 그는 죄사함을 노래하듯 강조하며 그 절대적 중요성을 알렸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시라고 했고, 자신이 몸소 실천한 것처럼 가장 낮은 이의 발을 씻으라고 가르쳤으며,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는 개인의 죄를 대신할 대속물 없이 온전히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며, 유대인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는 아버지를 믿는 사람이라면, 땅에서 유대인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곧 최소한 야훼를 섬긴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구원의 최저 기준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의 선함과 의로움을 증명하며, 아버지의 선택을 바라며 살아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버지의 선택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읽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의 실수나 행위를 대신해줄 대속물은 없다. 다만 예수가 남긴 지식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십자가를 죄 사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2 대속물은 없다

 

* 전편을 이어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올 때 세상은 이미 극우가 판을 치고 있으며, 사람들은 양과 염소로 나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재림을 알리는 징조로서, 양과 염소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유대교는 자신의 죄가 대속물을 통해 용서받는다고 믿는다. 이러한 개념은 종교적 상징에 머물지 않고 실제 현실에서 혼이 육신이 저지른 죄로 처벌받지 않도록 만드는 구조로 이어졌다. 야훼는 혼이 소멸하는 죽음을 피할 방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주었으며,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이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 다시 그 삶을 반복하는 윤회를 소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오랜 세월 지속되었고, 그 결과 유대 민족은 더욱 강해지고 지속적인 생존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엘로힘으로부터 직접적인 정죄를 받지 않는 특권적 위치에 놓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나 가나안 족속의 학살과 같은 행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그 책임이 묻히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육신으로 살면서 저지른 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게 되면, 악은 당연히 더 깊은 악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가인의 벌은 일곱 배이고, 그 후손의 벌은 일흔일곱 배'라는 성경 구절과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는 144천 명만을 선택했고, 그들을 부활시켰다. 그 외의 사람들은 결국 혼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더 득세한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악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으며, 혼의 반복된 윤회를 통해 더 많은 악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악인에게는 끝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돈이 마치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돈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법은 허용된다는 왜곡된 생각이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상에 천국의 아들이 강림하여, 기존의 모든 법칙이 이미 깨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수는 인간이 땅에서 행한 행위를 통해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얻게 된다고 말했으며, 그렇지 못할 때 혼은 영생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한편, 그는 야훼의 영들이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알리고 떠났다. 그리고 예수는 선과 악의 마지막 결말이 드러날 때 재림의 날이 된다고 말했다.

 

* 극우가 많아지고 그들은 염소가 되어간다.

 

초대교회의 주된 교리와 전도 방식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대속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은 죄가 없다고 전파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구세주를 믿고 따르는 자는 살아서 영생을 얻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전했다.

 

초기 기독교가 주장한 예수가 인간의 대속물이란 교리는 엄청난 함정이다. 초대교회를 다스리는 신이 엘로힘과 야훼인 것을 알면 모든 것이 풀린다. 이들은 인간이 영생의 신이 되길 원하는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인간은 지상을 다스리는 엘로힘과 야훼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예수가 떠난 자리에 세상의 임금이 다시 차지하고 사울이란 사람을 세워 히브리 율법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야훼와 예수와 혼합된 종교가 만들어진다. 사울은 여호와의 메시아이다.

 

사울(바울)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한 희생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율법만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울 자신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회개하고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초대교회의 엄격하고 순수한 신앙은 중세로 넘어가면서 점차 약화했고 죄 사함을 돈으로 사고파는 면죄부의 관행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심각한 부패로 이어진다.

 

중세교회는 죄의 용서를 위해 고해성사, 보속, 참회 등의 절차를 요구했으며, 이는 일종의 대속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면죄부 제도 또한 단순히 기도만으로 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금전적 기부나 일정한 행위와 결합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와 그 신학적 근거를 강하게 반박하며, 죄 사함은 단순한 외적 고백이나 금전적 거래가 아니라 진정한 영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면죄부를 사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라며 면죄부에 의존하는 신앙 행위가 신자들을 미신에 빠뜨린다고 지적하면 오직 믿음으로만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개신교는 종교개혁이 강조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칙을 여전히 신앙과 교리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는 죄의 용서와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돈, 교회의 제도적 중재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복음을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죄의 문제는 예수로부터 출발했고 결국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왔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과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게 되면,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 않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즉 살아서도 벌을 받지 않고 죽어서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 믿게 되면 악은 점점 더 깊은 악으로 나아가게 된다. 믿는 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악한 행위로 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불편함을 느끼면 그것을 헌금이라는 형태로 보상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 일부를 교회에 바침으로써 죄에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마태복음 5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사람에게 행한 악을 예수의 이름과 교회에 바친 돈으로 해결되었다고 믿으니, 악은 더 깊은 악으로 빠져든다. 인간이 육신의 행위로 한 악은 육신의 처벌을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이런 처벌을 피한 사람은 혼이 그 악을 감당하여 벌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모른 사람들은 살아서 지은 죄는 예수 안에서 모두 용서를 받았다고 착각하여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생을 살다 죽은 혼은 다음 윤회에서 더 사악해지고 간교해졌다.

 

판결하는 자를 만나기 전에 고발당하지 않게 모든 것을 풀고 갚아야 한다. 이런 심판과 구원이 2,000년이 걸렸으니, 사람들은 심판이 없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믿는 자들이 악을 행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더욱 악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추구하며 삶을 소비할 것이다. 이는 마치 주인이 없는 포도원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악을 저지르던 청지기나 품꾼들로 결국 주인이 돌아오자 쫓겨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교회가 믿고 섬기는 야훼 또는 엘로힘 하나님은 지구라는 농장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들은 점점 더 염소가 되어간다.

 

* 예수의 죽음이 구원이라 믿는 교인은

 

교회는 처음에는 미숙했고, 그다음에는 타락했으며, 이어서는 성결해지기를 원했지만, 마지막에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믿는 자들 율법에 따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예수가 지상에 온 이후, 인간 내면에 뿌려진 천국의 씨앗, 혹은 겨자씨로 비유된 생명의 빛은 우리 안에서 양심과 도덕이 되어 행위를 제약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저 사람이 저렇게 죽어선 안 되지',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다니'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며 개인의 고통이나 죽음, 약자가 강자에게 고통받는 일들이 우리 눈에 거슬리고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인간에게 준 빛으로 나아가는 참회의 길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자들로부터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비추는 이 빛을 외면한 채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 않았으며 결국 '극우'라 불리는 가장 끝단에 이르게 된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와 피를 팔아 장사를 했다. 중세교회는 죄의 문제를 돈으로 사고파는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 교인들은 헌금으로 그 일을 대신한다. 교인들이 자기 행위의 악을 대하는 방법을 보면 참혹하다.

 

예수의 제자들 이후, 믿는 사람들이 주장한 예수의 십자가 구원이 과연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육신으로 저지른 죄는 육으로 처벌받거나, 진정한 참회를 하거나,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해야만 온전히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신자는 이상하게도 열 가지의 악을 저질러도 그중 하나만 드러나면 처벌을 받고 설령 드러나더라도 그 처벌조차 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들이 과거에는 왕과 귀족, 기득권자였고, 오늘날에는 돈이 많은 재벌이나 정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땅에서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죽으면 혼의 몸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땅을 다스리는 신이 그들의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므로 그들은 책임을 면했다. 그 결과, 악을 행한 자들은 다음 생에서 더 큰 악으로 윤회하게 되었고 그렇게 점점 더 왼편으로 치우쳐 가게 된다.

 

가톨릭교회(로마 가톨릭)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특히 사도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시작된다. 교회는 1세기 예수의 제자들이 세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연속으로 2세기 초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렇게 유럽에서 먼저 믿은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속물로 사용하며 스스로 돌아보는 생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더 왼쪽으로 가는 생을 윤회하여 결국 염소라 불리게 된다.

 

개신교는 16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미국을 이주하는 기간을 거치는 동안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의 교리는 인간을 스스로 돌아보는 때를 놓치고 그들도 점점 더 왼쪽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에는 19세기 말 개신교가 전파된다. 이후 한국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자기의 악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예수가 대신 진다고 믿는 이들과 예수의 희생을 본받아 바른 삶을 살고자 한 이들로 나뉘게 되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악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를 알고 사회와 국가, 공동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로 극명하게 갈려진다. 이러한 구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도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교회 교리는 이상하게 전파되고 이렇게 급진적으로 극우와 된 원인에 인간의 윤회를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한국은 생명의 마지막 발로로 영적인 가뭄 가운데 유일하게 자발적인 생수가 흘러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의 전생을 지닌 특히 일본인으로 산 혼의 인간이 한국에 윤회했고 야훼의 부활 백성이 한국을 장악하려고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극우화가 빨라졌다.

 

지구는 온통 염소와 양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예수의 재림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재림의 순간에 염소와 양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염소와 양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일 때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다. 이때 한 무리는 왼쪽으로 다른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나뉘게 된다. 이것은 세상의 종말이나 지구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점점 양이 되어가는 사람은

 

그렇다면 양은 어떻게 오른편으로 가게 되는가? 그것은 예수가 인간에게 뿌린 천국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내면의 빛이 발현되어 그것을 감추지 못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웃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함께 외치며 저항하다가, 지주의 몽둥이에 맞아 고통 속에 죽는다. 나라가 망했을 때는 나라 없는 민족이 될 수 없다며 낫을 들고 싸우다 죽는다. 누군가는 마녀로 몰려 누명을 쓰고 희생당하지만,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며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이름 없는 이들의 몸부림 속에서, 빛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 움직인다.

 

이처럼 삶을 살아낸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 혼은 다음 생의 더 큰 대의와 더 많은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육신으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은 짧지만, 그 속에서 발현된 빛은 더욱 강렬해진다. 혼의 내면에서 자라난 빛은 점점 강해지며 마침내 하나의 나무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들은 점점 더 오른편을 향해 나아간다.

 

한국은 한때 악한 대통령과 무속 신앙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이를 다시 빛의 나라로 세우려는 이들의 외침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모든 기준의 중심에는 이재명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재명은 마치 십자가에 달린 기준과 같은 존재다. 그를 옳다고 인정하는 자는 양이요, 그를 죽이려 하거나 반대하는 자는 염소로 구분되는 마지막 분별의 시점에 와 있다. 이는 스스로 의로움을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 맞이하는 최종적인 키질과도 같다. 키질하면, 무거운 알곡은 아래로 떨어지고, 가벼운 가라지는 바람에 날려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믿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에 바친 헌금을 죄 사함의 대속물처럼 여기며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는 진정한 회개의 기회가 사라진다. 누군가는 수천억 원을 벌기 위해 저지른 악을 덮기 위해 백억 원을 기부하고 또 다른 이는 십억 원을 교회에 바친다. 이처럼 헌금을 통해 회장은 목사의 축복과 장로에게 죄 사함이라는 안부를 받는다.

 

행위의 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의 생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차곡차곡 지금도 쌓아져 가고 있었다.

 

마태복음 25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 모든 인간은 이미 양과 염소로 나뉘어 살아가고 있다. 이때 염소는 왼편으로, 양은 오른편으로 정렬시키는 이가 바로 재림주이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른쪽의 양은 아버지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은 생의 윤회 동안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빛을 따라 주리고 헐벗은 자들을 도우며 살아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그 모든 행위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양이 되기도 하고 염소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예수는 어디에서도 헌금이나 교회 건축 혹은 성직자의 섬김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누구든지 높은 자가 되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자기 행위의 대속물은 없다. 오직 예수가 전한 가르침만 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