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ive Salvation. 선택적 구원

구세주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geun2 2022. 8. 8. 13:45

 

구세주 강림에 대한 예언은 성경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구세주는 잃어버린 양을 구출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인식관 대로 강림해야 했으며 율법에 기록한 것을 지켜야 했다.

 

예수 복음서에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여 구세주 강림을 정당화하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가 하는 말이나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따로 있어 보인다.

그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태어났는지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 이 시대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의 대상을 찾는지 지금도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재림에 관한 예언은 대표적인 성경이 요한계시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다.

 

여러 저자의 글을 편집자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믿게 하려는 의도로 요한이 기록했다고 말하지만 여러 편의 글을 짜깁기되었다.

 

성경을 편집한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의 진정성과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신앙인들을 위해 편집한 것만이 아니다. 정치적인 의도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 예수의 복음이 편집되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된 네 개의 복음이 있을 필요가 없다.

 

예수의 어릴 적 사건이 나오는 기록도 있고 설교나 말씀만 따로 모아둔 기록도 있다.

예수가 부활한 이후 제자들에게 전한 복음도 있으며 여자 제자의 기록도 있지만 모두 배제되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행적을 기록한 4편의 복음이 지금의 신약성경이다.

 

왜 사도바울의 서신이 그렇게 많이 인용되고 남아 있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지금의 교회는 자신들이 가진 집단을 합리화하고 교리를 편의대로 해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신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헌금과 십일조.

하나님을 대신한 성직자와 교회의 여러 직책.

복음의 대중화를 위해 예수의 복음을 왜곡한 교리.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

 

사도바울이 많은 일을 했어도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천국의 아들이 아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얻어지는 것이다. 누구도 예수를 넘어서는 권위는 없다.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이 자기들에게 걸림돌이 되면 사도바울 서신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인용하여 자기들을 변호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형성이유를 사도바울 서신에서 찾아 가르친다.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하는 종교집단도 예수의 복음이 핵심이 아닌 다른 성경 구절로 그대들의 교리를 설명하거나 포장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은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느낌이다. 모든 복음을 지켜 행하기엔 구원의 문턱이 높고 그의 말을 무시하기엔 예수를 믿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런 이유인지 사람들이 예수가 전한 복음 이외 다른 성경에서 교리나 신앙인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모습을 자주 본다.

 

구약에 있는 십일조와 같은 헌금과 사도바울이 전한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너무나 달콤하다.

 

구원은 예수의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다. 예수 또한 복음이 각자에게 멍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구원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가 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1장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천국을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영혼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영생을 얻는 방법과 천국을 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 각자가 짊어지고 가는 멍에가 있어도 결국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아무런 희생과 수고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와 예수의 멍에를 지고 복음을 배워야 한다는 말 중에 각자가 어느 것을 선택할지 개인의 몫이다.

 

만약 예수가 복음으로 그대들을 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하고자 한다.

 

마태복음 22장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사람들이 천국을 아름다운 성전과 풍요로운 삶이 있는 장소로 기대한다. 천국에 대한 이미지를 보석으로 치장된 겉모습을 상상하는데 이런 이유가 요한계시록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복음도 아니고 제자 요한의 글도 아니다. 성경을 편집한 사람들이 왜 여러 편의 글을 모아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했는지 나는 알고 있지만 지금 설명은 생략한다. 다음에 요한계시록을 설명은 따로 할 것이다.

 

다시 예수의 복음에 집중하자.

예수는 천국을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 했다.

핵심을 설명하면 이러하다.

 

1. 천국은 완성된 곳이다.

2. 임금의 허락 없이 갈 수 없다.

3.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문을 크게 개방하여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4. 임금의 호의를 배반하고 임금이 보낸 사람을 죽인 모든 자를 심판한다.

5. 아들의 혼인 잔치는 다른 사람을 청해서라도 진행한다.

6. 하나님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우리가 받은 교훈은 천국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때를 정하고 천국의 문을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에 들어오게 했다.

 

아들을 위해 성전의 문이 열린다.

문에 들어가는 때가 정해져 있다.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보낸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죽이거나 해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택한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나 성전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우리는 육신의 삶에 취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다.

 

모든 언론과 영상 미디어가 젊은 사람에게 도전하길 권하고 꿈을 이루길 독려하며 열심히 살라고 채찍을 가한다.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때리는 기수처럼 잔혹하다.

스스로가 생각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어린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좋은 대학과 출세할 수 있는 전공을 택하길 열망하며 돈과 명예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하며 쉬지도 말고 달리길 요청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디어에 속고 있다.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기업의 물건을 구매하고 기업이 홍보하는 영화나 스포츠를 관람하고 그 많은 명품을 얻기 위해 쉼없이 달리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돈을 벌려는 기업의 속임수에 매일 TV에 앉아 시간을 낭비한다.

 

인생의 낙과 안식이 온통 TV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복음을 다시 보라고 청하는 나의 말은 쉽게 지나치는 바람과 같다.

 

11절을 보면 무지한 사람은 임금의 성에 들어왔어도 자신의 교만을 들어내고 가진 물건을 장사하려고 한다. 성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지도 않고 잔치에 취해 시간을 낭비한다.

 

예수가 복음을 전하는 시대도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성전에서 그의 말을 들었지만 대부분 그를 떠나갔다.

지금도 이 내용이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이단의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나에게 유대인이냐고 질문을 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모두가 복음을 들을 수 있어도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56절처럼 돈 벌어야 먹고 살지. 공부해야 좋은 직장가지. 출세해야 호강하지.

어디서 이단 같은 발상으로 교인들을 속이는 말을 하냐며 비난이 쏟아진다. 지금은 이념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시대가 아닌 것에 감사한다.

 

돈으로 영생을 사지 못한다. 지금 눈에 보이는 시간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하라.

죽음 앞에서 이 말이 생각나도 그땐 이미 혼인 잔치는 끝난 상태이다.

 

구원과 심판은 항상 있었다.

모두가 심판은 맞이한다. 죽음이 그때이며 모두가 진실이라 믿는 것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구원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