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

천국에 가는 방법 2편

geun2 2023. 1. 3. 08:28
교회와 다른 성경 이야기.  2025년 예수 재림의 해
https://cafe.daum.net/good-horse/

 

구세주의 구원 값

 

여러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주인이 있었다. 집사로 살아가는 순간이 행복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삶이 만족스러웠다. 그런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그 아이를 찾기 위해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집주변, 길 너머 마을, 들과 산으로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길고양이들을 만났다. 그가 만난 고양이들은 돌봄을 받지 못해 상처나 병든 녀석들도 많았다.

 

그는 그들이 눈에 밟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자기 고양이를 찾음과 동시에 길고양이를 챙기는 일이 그에게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정처 없이 떠도는 고양이들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눈에 익은 고양이가 등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도 아니고 몇 번 눈에 스쳤던 아이라 외면하지 못하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는 수술이 필요하고, 치료 기간도 몇 주가 소요된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요양하면 병원비만 수백만 원이 드는 상황이었다. 치료과정과 비용을 생각할 때 자기 집에서 치료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길에서 생활한 아이가 어떤 성격인지 모르고 몸에 나쁜 병균을 가지고 있어 자기 집에 사는 고양이들에게 해가 될지도 몰라 고민이 되었다.

 

수술 없이 며칠을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그동안의 길고양이 모습은 사람을 의지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격도 순하였다. 그래서 가족들과 의논하여 집 안의 작은 공간에서 그를 치료하기로 했다.

 

앙상하게 마른 몸, 거친 털, 못생긴 얼굴, 씻지 못해 더러운 피부는 집에 있는 고양이와 비교되었지만, 고양이 특유의 애교와 다정함이 잘 갖추어진 아이였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의 마음을 얻고 치료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이런 고양이는 사람이 입양해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양처를 알아보았다. 만약 좀 더 큰 공간이 있다면 이런 아이들이 함께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중에 잃어버린 자기 고양이를 찾았다. 별다른 질병이나 다친 곳이 없이 집에 돌아와 기뻤다. 캣맘은 자기 고양이가 돌아왔지만, 길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매일 사료를 들고 마을을 걸어 다녔다. 그런 시간 속에서 다치고 병든 아이들과 마주하는 횟수는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그들을 치료하거나 편히 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긴 시간의 토론을 시작하였다. 자기 고양이와 사는 것으로 만족할지, 아니면 길 위의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치료하는 것들을 어디까지 하는 것이 좋은지 의견을 나누었다.

병들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받고 생활비를 저축하여 새로운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가족으로 살아온 자기 고양이가 살아가는 본채를 좀 더 크게 짓고 길고양이를 치료하고 그들이 함께해도 좋은 별채를 마련하여 두 개의 집으로 나누었다.

 

길고양이를 위한 새로운 별채가 마련되고 집사의 도움이 절실하면서 사람과 함께 살아도 좋은 아이는 입양처를 알아보았다. 그런 많은 고양이 속에서 집사의 사랑을 받는 녀석이 생겼다. 예쁘거나 잘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집사를 보면 늘 기뻐하고, 낯선 고양이를 배려하는 모습이 집사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배려심이 많고 싸우지 않는 아이는 집사의 집으로 옮겨 평생을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 항상 성격이 좋은 고양이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죽은 고양이도 있었다. 다른 고양이를 해치는 고양이는 과감하게 다시 길로 돌려보냈다.

 

그런 고양이의 죽음에는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 길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기 동료를 죽이고 서열 싸움에 눈이 먼 고양이는 다시 자신의 거처로 쫓겨났다.

 

구세주의 구원에서 왜 길고양이를 돌보는 집사의 이야기로 시작했는지 눈치를 채길 바란다. 우리의 인생도 목자 없는 길고양이와 같다.

 

마태복음 9장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참 목자가 있고 삯꾼 목자가 있듯이, 구세주는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듯이, 사람의 영이 알곡과 가라지로 나누어지듯이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은 아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신의 기원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을 통치하는 엘로힘 여호와와 야훼 여호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신이다. 그가 아브라함을 택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종교로 통치한 이유는 지상에 강림하는 구세주를 죽이려는 의도였다. 요한복음 1장에 구세주는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라 가르친 복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상은 어둠이고 우두머리 통치자 얄다바오트는 엘로힘과 야훼의 아버지이다. 사람을 속이려는 생각으로 모두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른다.

 

여호와가 창조한 아담과 여자는 생명의 빛이 있는 혼의 인간이다. 여호와가 빛의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창조된 혼의 인간에게 빛이 들어갔다. 이것은 천국 아버지의 계획이다. 오류로 발생한 어둠의 세계가 원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신의 기원편을 읽어라)

 

아브라함 이전의 이야기를 육신의 사람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아담과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이 생긴다. 아브라함 이전의 창세기는 영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인간이 신과 대화하고 신을 피해 도망 다니는 모습 인간의 육체로 해석한 교회는 거짓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아담의 가죽옷이란 동물의 육체를 입고 지상에 쫓겨나는 혼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물의 육체를 입고 쫓겨난 혼의 인간은 아담뿐만 아니라 사탄과 명령을 어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다.

 

창세기 6장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상의 아담의 후손을 간음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스스로가 육신을 입기를 청하는 장면이다. (홍수심판 참조)

 

아담과 여자의 후손이 생명의 씨앗이 있는 영생할 수 있는 존재들이고 다른 인간은 여호와의 사람들로 영생을 위한 빛을 발견하지 못한 존재이다. 야훼는 아담의 영적인 후손을 이스라엘 민족의 육체에 감금하고 관리했다.

 

생명의 영을 지닌 천국의 자녀를 울타리에 가두고 그들을 구출하러 오는 구세주를 잡기 위한 덫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야훼의 백성은 자신의 후손과 아담의 후손, 그리고 사탄의 후손으로 구성되어있다. (사탄의 손을 잡은 여호와를 읽어라)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세주를 잡기 위한 덫을 놓았다. 그것이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의 발목을 잡고 죽인 이유가 율법을 어긴 대가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율법의 위력은 대단하다.

 

요한복음 7장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아무리 옳은 복음을 전해도 율법과 다르면 이단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도 안식일에 행하면 죄인이 된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병을 고치는 일도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안에서 해야 한다. 창녀나 세리는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인식은 율법에서 시작되었다.

 

할례로 구별된 장자 상속의 역사.

유일신에게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

 

율법 밖의 인간은 죄인이고 상종을 못 하는 사람으로 구별되었다. 예수의 모든 행위는 율법으로 그 값이 측량되었다.

 

지금의 교회가 예수를 가르치는 나에게 교회의 가르침과 왜 다른지 묻는 어리석은 질문과 같다.

예수는 복음 외에도 육체로 그가 구세주임을 증명하고 여호와를 넘어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악한 본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마태복음 23장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눈이 멀고 귀를 닫아버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자신도 사용하지 않고 따르는 무리에게도 감추어 버린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육신을 더 사랑하여 속에 있는 영혼의 가치를 상실했다. 아니 처음부터 영혼의 가치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중심으로 하여 살도록 동요한 자가 여호와가 아닌가.

 

유대인들이 돈에 눈이 밝고 정치적 배경에 힘을 많이 쓰는 이유가 그러하다. 그들은 죽어도 영생을 약속받지 못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서 모든 것을 이루면 끝나는 인생이다.

 

마태복음 10장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의 구원이 처음부터 포괄적인 것은 아니었다. 집사가 잃어버린 자신의 고양이를 찾아 길을 떠나듯 예수는 잃어버린 아버지의 자녀를 찾아 육신으로 지상에 하강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생명을 찾으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아주 작은 숫자의 생명만이 구원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천국 아버지의 자녀가 모든 인간이라 가르치는 교회는 거짓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분명 자신의 양이 있고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좋은 물고기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교회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이라 가르치고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예수로 가는 길은 잃어버리게 하였다. 지금의 교회가 예수가 없는 이유이다.

 

죄인도 예수를 믿으면 죄가 사라지고 부자도 헌금을 많이 하면 의로운 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천국으로 가는 값이 할인을 너무 많이 받아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있다.

 

넘쳐나는 교회, 아무나 가는 천국, 지급해야 하는 비용이 없는데 굳이 시간을 투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다가 늙어서 회개하고 자신이 가진 일부 돈을 기부하면 쉽게 얻어지는 천국에 비싼 청춘의 값을 내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 채 그 영혼은 소멸한다.

 

천국의 가치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가는 곳이다.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예수와 그이 아버지를 알기에 힘을 쓰고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길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육신 속에 갇혀있는 혼이 영의 몸으로 거듭나야 영생에 이른다. 나무에서 열매를 따야 하고 새의 알에서 새끼로 태어나야 한다.

 

마태복음 15장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는 이스라엘에 있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하강한 구세주이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란 표현은 교회가 만들어낸 거짓 진리이다. 지상의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자신의 양을 찾아다니는 동안 길에서 만난 주인 없는 양들의 고통을 보고 가슴을 아파하시면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마가복음 1장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마태복음 14장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태복음 15장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병들고 배고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의 모습을 구원의 핵심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병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 구원의 본질로 왜곡되면 안 된다.

 

신약성경에 예수로부터 병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따른 사람이 있는지 보라.

 

육신의 문제와 영의 문제는 다르다.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육신의 구원이라면 영의 구원은 영생하는 몸으로 천국 아버지 나라에 가는 것이다.

 

아버지 나라는 육체가 아닌 영으로 가는 곳이다. 예수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고통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우리가 구제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한 합당한 마음을 가지려는 의도이다. 아버지 나라에 흠이 없는 존재로 선하고 착한 행실로 자신의 혼을 빛나게 만드는 방법이다. 만약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증거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진리를 쫓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면 영도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죄를 지은 창녀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 창녀가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의심이 된다. 나는 확신한다. 그녀는 다시 죄를 지었다.

예수를 보고 죄에서 벗어나 의로운 행실로 거듭 태어났다면 그녀 또한 구원받지 않았을까?

 

집사가 길고양이를 불쌍히 여겨 밥을 주고 병을 고치는 일과 자기 집에 들여 함께 사는 일에도 시간과 신중함이 따르는데 하물며 육신이 불쌍하다고 그 모두를 천국의 아버지 나라에 들 일 수 있겠는가.

 

천국은 불쌍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으로 의의 열매를 맺고 합당한 예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간다.

 

품꾼의 비유.

혼인 잔치 비유.

좋은 진주 비유.

씨앗을 뿌린 농부비유.

농장을 맏기고 떠난 주인의 비유.

지혜로운 처녀 비유.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곳에 천국에 합당한 기준을 명시한다.

좋은 열매.

선한 일꾼.

농장의 소출을 제때 주인에게 바치는 사람.

가장 좋은 진주.

준비된 처녀.

 

요한복음 6장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자가 예수께 온다면 그를 구원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오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먼저 온 자가 나중 되고 나중에 온 자가 먼저 되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아담의 후손들이 오랜 시간 육체 속에서 자신의 근원을 잊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소망을 버린 채 흑암의 깊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그들이 귀가 멀고 눈이 멀어져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함을 책망하는 이야기다. 기다리다 지쳐 잠이든 처녀 비유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선택받고도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고 오히려 예정이 없던 길에서 만난 거지가 혼인 잔치의 하객으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했다.

 

육신의 4000년의 세월은 길다. 그러나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며칠에 불과하다. 2000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게 상상이 안 되는 기간이지만 구세주에게는 가라지를 태우기 전에 사람들에게 배려한 며칠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이 시대는 깨어나야 하는 때이다. 신랑이 문에 도달해 있음이다. 예수가 가르친 복음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교회에 차고 넘치지만 그들의 설교에는 생명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만이 생명이고 영생이며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마태복음 19장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의 무리는 선택받은 아버지의 자녀들로 도마, 요한, 야고보 같은 사람들이다. 잃어버린 양과 같고 잃어버린 집사의 고양이들이다.

 

또 한 무리는 베드로와 가롯 유다 같은 사람들이다. 길에서 생활하는 길고양이 같은 영혼으로 처음부터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아니라 친구 따라 갔다가 구세주를 만나고 예수를 사랑하여 예수의 거처에 있게 된 무리이다.

 

아버지의 선택받은 자녀는 진리를 만나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영적인 세계를 깨우치는 순간부터 육신의 욕구를 멀리한다. 자신의 영혼을 받아줄 그때를 기다리며 선하고 흔들리지 않고 살아간다. 집을 잃어버린 고양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을 알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길고양이는 집사의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린다. 그런 과정 중에 쫓겨나 자신이 처소로 돌아가는 고양이도 있다.

 

가톨릭의 첫 교황이라 불리는 베드로는 길고양이다. 예수가 택하여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했다. 그런 이유로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 가롯 유다는 주인을 헤쳐서 쫓겨난 인물이다.

 

이처럼 구세주의 긍휼함을 입는 사람도 그 마음의 값에 따라 구원이 각각 달라진다.

 

예수가 행하는 모습과 가르침을 보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천국의 자녀는 아니지만, 구세주가 아버지 집에 거하기를 청했고 그들이 천국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는 그들을 위해 값을 내야 했다.

 

요한복음 10장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자신이 잃어버린 양이 아닌 길에서 만난 양들이 구세주를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값을 지급해야 했다. 집사가 길고양이들이 생활하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받아 새로운 집을 지은 것과 같다.

 

예수를 선택하고 예수가 선택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구원의 값으로 지불한 존재가 구세주이다.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의 제자 중에 일부는 처음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여 들일 처소가 필요했다. 길고양이를 위한 별채 같은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도 충만하지 못한 영혼이 머무는 가장 낮은 장소가 있다. 예수가 그들을 위해 처소를 마련한 곳이고 천국 아버지의 자녀로 충만해지는 준비를 하는 곳이다.

 

예수가 육신의 값을 내어준 결과가 구원받기 부족한 영혼이 머무는 집을 마련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그들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을 모르는 교회는 아무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구원은 따르는 사람의 선택과 구세주의 선택이 맞아야 이루어진다.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버지의 처소에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구세주가 그의 행실이 아버지 나라에 합당하다고 여기면, 길고양이처럼 별채에 들여 정성으로 그들을 돌보게 되는 것이다.

 

길에서 생활한 당신이 만약 아버지의 처소에 들어간다면 어떤 행실과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이해가 되는가?

 

영적인 상황을 몰라서 교회는 육신이 가진 80년 정도의 시간으로 구원에 이르는 값을 치를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어린 시절과 먹고사는 시간을 제외하면 인간이 착한 행실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시간은 적다. 그 시간에 혼의 몸이 영의 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이다.

육신의 값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다.

 

길고양이가 집사 집에 들어와 의를 행하는 조건으로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집사의 긍휼과 배려로 가족이 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과 희생으로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인을 사랑하고 그가 선택한 형제를 사랑하며 모든 것을 드려 구원을 소망하는 마음이 그 나라에 머물게 하는 조건이다.

 

예수의 제자 중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 천국의 자녀로 회복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말은 천국이 아닌 별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는 이런 사람을 충만에 무지한 자들이라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없는 말이다)

 

충만하지 않지만, 충만에 이르게 되는 자들을 말한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고 오직 예수를 따라와야 아버지에게 이른다고 가르쳤다.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죽으니 천국에 있더라는 말은 사기다.

살아있는 동안 예수의 선택을 받고 예수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별채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천국에 합당한 영으로 거듭나면 아버지 나라에 입성한다.

 

그러나 빈번히 거리의 생활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음을 잊지 말아라.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는 처녀들도 50%가 들어가고 혼인 잔치의 청함을 받은 모두는 버려지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는 것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