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신의 두 아들.
교회에서 듣지 못하는 깊은 창세기 내용은 다음카페 요기에.
2025년 예수 재림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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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숨긴 이야기.
1편부터 보시라.
얄다바오트의 아들에 대해 알아보자.
어둠의 세계에는 여성성이 없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 다만 창조를 통해 신들이 필요한 것을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우두머리 통치자의 아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얄다바오트는 자신이 아담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여자를 간음한다. 아담의 여자를 가장 먼저 간음한 존재가 우두머리 통치자 얄다바오트다.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담이나 다른 남자에게 먼저 놀아나게 버려둘 악한 왕은 없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여자가 생산한 두 아들을 아담의 자식으로 속이기 위해, 가인과 아벨로 불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얄다바오트의 두 아들인 엘로힘과 야훼이다.
엘로힘은 물과 흙을 다스리는 신이고 야훼는 불과 바람을 다스리는 신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불과 바람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가인과 아벨을 교회에서는 아담의 아들로 가르치지만, 빛의 아담이 생산한 아들들이 서로 싸우고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살인을 하는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혼의 인간은 육신처럼 아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복제라고 이해하면 된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아주 중요하다. 얄다바오트가 자신의 아들을 지상을 다스리는 신으로 하강시킨 이유는 아담의 후손을 감시하고 그들이 빛으로 영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담이 영생하는 천국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는 그를 돕는 조력자가 나타났다는 말이고, 그 조력자는 곧 천국의 아들이다. 아들의 강림은 얄다바오트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얄다바오트는 그를 절대적으로 막아야 했었다.
마태복음 15장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말을 기억하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강림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인간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이 말은 혼의 몸이 육신 속에 숨어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그 속을 보시는 분이 구세주이다.
참 목자를 따르는 양이란 표현과 선택받은 자,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 같은 많은 가르침에서 예수는 자신이 특정한 누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아버지에게 선택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 신부들도 50%만 혼인 잔치에 들어간 것을 볼 때 아담의 후손들도 긴 시간동안 자신의 기원을 잊어먹은 사람이 많았다.
마태복음 18장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딱 이 구절이 예수가 지상에 온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다.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구세주는 예수라는 육신을 쓰고 지상에 강림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 성경 핵심이다.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겨자씨만큼의 빛이 있어야 가능성이 있다. 믿고 기다린 신부도 반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다. 예수는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 명했다. 진리에 깨어 있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눈이 멀고 귀를 닫아 버린다면 혼은 소멸하거나 영원한 불로 떨어진다.
깨어 있다는 것은 구세주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 아는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하고 거짓과 진리를 깨우치고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 때가 이르렀다.
예수가 육신의 인간으로 나타났는지 알아야 한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간이 자유의 시간이다. 이 말은 감옥의 죄인들이 감옥을 벗어나면 수갑과 포승줄에 묶여 간수의 감시를 받으며 이동을 한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는 좁고 제한적인 행동이지만 그래도 자유롭다.
혼의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동안 진리를 찾아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다. 영의 세계(얄다바오트의 세계)에는 진리가 없다. 오직 보이는 육신의 세계에서 전해진다. 만약 영적 세계에 구세주가 나타난다면 얄다바오트의 세계가 파멸을 맞게 된다.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길어 요한복음을 참조하길 바란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에서 이미 구세주의 강림은 예언되어 있었다. 얄다바오트가 천국 아버지의 계획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지 모르지만 이미 첫 번째 빛의 하강이 있는 순간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돌려 놓으려는 신의 계획을 알았다. 여기서 신은 천국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얄다바오트가 자신의 세계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지상으로 자신의 아들을 인간의 감옥을 다스리는 신으로 보냈다.
엘로힘 여호와는 혼돈과 깊은 어둠이 있는 세계를 정비하고 생명을 생산하고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했다.
창세기 1장에는 무엇을 만들고 나면 하나님이 보시기 좋았더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엘로힘 여호와가 자신의 창조물을 기뻐하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지상에 보낸 이유가 땅의 주인이 오거나 상속자가 오면 때려 죽여서라도 땅을 빼앗기지 말라고 보냈는데, 아들이 그 땅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니 한심하게 느낀 것이다.
창세기 4장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얄다바오트는 세월이 지나 지상을 다스리는 야훼 여호와를 보낸다. 가인은 자신이 생산한 농작물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드려도 기뻐하지 않았다. 가인은 자신의 땅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그 결과물을 아버지에게 자랑하지만, 아버지는 그 일을 기뻐하지 않은 것이다.
후발대로 지상에 강림한 야훼 여호와는 이미 형이 모든 것을 이룬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엘로힘이 불의하고 야훼가 정의라 부르지만, 실상은 다르다.
구세주가 정의란, “자신은 하기를 꺼리는 일을 누군가가 꼭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야훼 여호와는 아버지가 손에 묻히기 싫어하는 일을 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구세주를 죽이는 일이다.
아벨이 드린, 양의 새끼라고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 않는가?
어린양은 구세주를 비유하는 말로 구약 성경에 자주 인용된다.
아벨은 지상에서 형을 이기는 권세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 힘을 빌리고, 대신 자신은 구세주가 어린아이일 때 죽여 당신에게 바친다는 약속을 한다.
아벨이 여호와에게 드린 어린 새끼 양은 구세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인은 동생의 손에 피를 묻히는 비정한 아버지를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오지만 이것은 아버지의 비정함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다.
이것이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거짓 진리로, 진실을 대면한 인간들이 신을 떠나고 진리를 찾아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속임수다.
예수가 진리를 알면 너희는 자유롭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 진리가 아닌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율법에 사로잡혀 죄인이 되고 여호와에게 구원을 구걸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요한복음 5장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언제 낫게 될지 모르는 치료의 희망이 구원의 족쇄가 된다. 38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가끔씩 전해 듣는 간증으로 자신에게도 구원이 올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교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먼저 들어가기 위해 싸우고 시기하는 무리 중에서 병을 고치지 못한 그를 예수가 고쳐준다
마태복음 11장.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구나 와도 좋다고 허락하지만, 임금의 혼인잔치를 외면하는 손님처럼 모두가 육신의 일에 빠져 있다.
시간은 흐르고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앞에 긍휼을 입을 자는 없다. 살아서 죽음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라.
가인이 아버지를 멀리한 이유는 구세주를 죽이는 선택을 하는 아벨도 죽는다는 사실이다. 어둠은 빛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 구세주를 죽이는 댓가로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아벨은 몰랐을까?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끝에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다. 아벨은 자신 앞에 보이는 세상의 권세를 잡기 위한 거래를 제안했고 아버지는 그것을 기뻐했다.
세상에서 생명을 해치고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부자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섬김을 받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자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부자들이 과학의 힘으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 달나라를 관광하겠지만, 그들이 실수를 하는 것이 있다. 인간의 뛰어난 머리와 직관력으로 내세에 관한 연구가 발전하여, 그 세계가 존재하며 영생을 위한 혼의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때, 그들은 통탄의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자신이 누린 부귀영화가 오히려 혼의 몸에 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자는 천국을 갈 수 없다 참조)
아벨의 거래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시작한 일로 결국 아벨은 죽음을 맞이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예언이 아니다. 구세주를 가장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임을 명심하라. 구약 예언의 내용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요한과 예수의 이름을 팔아 거짓 진리를 전하는 여호와의 계략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죽음을 맞이한 어린 양은 예수가 아닌 아벨을 의미한다. 야훼 여호와를 부활시켜 다시 지상을 장악하려는 얄다바오트의 계획이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요한계시록 참조)
마태복음 2장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야훼 여호와는 어린 구세주를 죽이는 일을 벌이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신약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람들이 예수가 구약의 계승자로 생각하는 이유이다.
구약에 있는 많은 예언은 야훼 여호와가 구세주를 잡기 위해 길목을 지키는 사자와 같다. 더 잔인하고 비정한 것은 아비를 잡기 위해 아들을 그 길에 묶어두는 것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아담의 후손인 빛의 자녀들은 이스라엘 민족 육체에 가두어 두었다. 당연히 야훼 여호와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구약의 예언을 보면 아이러니하게 두 가지 상징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구세주가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나거나 아니면 성공해 세상을 뒤집어 놓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어린 구세주가 죽는다는 말과 구세주가 해와 달과 별을 굴복시킨다는 두 가지 예언이 복합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천국 아버지가 모든 것을 근본으로 돌려 놓으려는 계획에 맞서는 얄다바오트의 의지가 예언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즉, 얄다바오트가 벌인 일에 대한 응당한 댓가를 받는다는 계시를 어둠이 얄다바오트인 나도 그냥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빛의 하강으로 해를 상징하는 엘로힘, 달을 상징하는 야훼, 별을 상징하는 사탄과 많은 권세자를 발 아래두고 굴복시킨다는 말에, 야훼 여호와는 나는 구세주가 자라기 전 어린아이일 때 모든 것을 처리할 것이다라는 말로 응수를 한다.
즉, 야훼는 ‘너희가 구출하려는 양을 내 울타리에 가두어 둘 것이며 끊임없이 율법으로 죄의 족쇄를 채우고, 기다리는 자들이 구세주를 분별하지 못하게 거짓 진리로 그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할거다.’라고 한다. ‘만약 그럼에도 빛의 하강이 있다면 내가 만든 길로 와야만 한다. 나는 모든 길을 막고 한 개의 길을 열어 너를 기다릴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 다윗의 열통을 따라 베들레햄이라 지역에 처녀인 여자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나라.’
야훼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가정의 첫 번째 아들, 그 예수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은 질문이 이러하다.
“ 고향이 어디고 ”
“ 너거 아버지 모하시노 ”
“ 어느 학교 나왔노”
잘못된 종교적 인식관은 자신의 손으로 구세주를 죽이는 일로 벌어졌다. 예언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편을 읽어보라.
요한복음 12장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예수와 야훼 여호와의 싸움에서 당연히 예수가 이긴다. 야훼 여호와는 모든 권세를 잃고 지상에서 쫓겨난다.
심판을 받은 세상의 임금은 당연히 야훼 여호와다.
마태복음 12장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가 행하는 일을 보고 귀신이나 사탄이라 말하지만, 예수가 이스라엘 집의 힘있는 모두를 이기고 왔다고 말했다. 여기서 잘못 이해하면 안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권세를 무너뜨렸다는 말이지 지상의 모든 신과 사탄을 물리쳤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야훼에게 굴복하지 않은 엘로힘과 다른 지역의 사탄들은 예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구세주가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다.
지구의 멸망과 종말론에 심취한 종교인들에게 예언과 지구의 끝에 대해 다시 설명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예수가 신랑이 있는 동안은 금식을 하지 않고 울지도 않지만, 신랑을 잃어버리면 비극이 생긴다고 가르쳤다. 예수의 혼인잔치가 끝나고 다시 오는 이 세상의 임금은 누구인지 생각을 해보라. 바로 엘로힘 여호와이다. 야훼 여호와가 쫓겨나고 예수가 떠난 자리에 사도바울 세워 여호와 이름을 전 세계로 확장한 자가 엘로힘 여호와이다. 지금의 가톨릭의 아버지가 엘로힘 여호와고 다시는 부활한 야훼 여호와가 개신교를 부활시킨다.
가톨릭의 미사나 문화를 보면 이방신에게 하는 형식이 많이 묻어나는 이유와 그들이 여성성인 마리아를 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아버지가 엘로힘 하나님이다.
구교와 신교가 죽도록 싸운 이유를 이해하겠는가? ( 신들의 전쟁 참조)
결국의 집안의 왕자들이 왕권을 놓고 벌이는 종교전쟁이었다.
다시 두 아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벨은 가인이 죽인 것이 아니다.
얄다바오트는 아들이 구세주를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호기롭게 말하는 아벨의 말에 기뻐했다. 그것을 얄다바오트가 몰랐을까?
그때로부터 엘로힘은 아버지를 떠나 지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가인은 인간의 과학과 문화와 예술과 경제를 지배하는 신이 된다. 그 모든 것을 지배하기 위해 잔인하고 독해져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