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이 타락하는 과정에서 신은 왜 침묵했는가?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면 구교와 개신교의 싸움은 왜 일어났는가?
여호와를 섬기는 유대인들은 왜 학살을 당해야 했는가?
지금까지 지나온 종교역사를 보면 과연 그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섬기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입으로는 평화와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역사의 길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모두가 신의 뜻이라 말하며 벌인 비참하고 더러운 살인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평신도나 일반시민이었다.
이런 역사에 신의 개입이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신을 섬기는 사람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발상이다. 모든 일에는 신들의 싸움이 있었고 그들의 싸움에 인간이 희생되고 죽어간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종교인의 타락과 부패와 살인이 천국 아버지의 뜻이거나 묵인이라면 나는 그를 섬기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저지른 사악한 행위가 회개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리는 가짜다.
천국 아버지는 인간의 사악한 행위를 회개 따위로 용서하거나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
구약의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과 용서와 축복을 번갈아 행하는 모습에서 인간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육신의 죄악은 영혼을 병들게 하는 벌레 같아서 살아서 용서를 받아도 영혼이 회복되지 않으며 완성되지 못한 영혼은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약의 여호와는 천국의 아버지도 아니고 예수의 아버지도 아니다.
인간에서 영혼의 구원을 약속한 신도 아니다.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은 존재가 아닌가.
초대교회에서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그들이 천국의 아버지를 알고 섬기는 백성이었다면 절대 타락하거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수 많은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말해야 한다.
베드로와 바울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는가?
두 사람이 같이 만나서 뜻을 같이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성경 구절을 보았는가?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요 바울은 스스로가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지만 난 동의 할 수 없다.
예수가 죽은 이후 벌어진 복음의 역사는 과히 비참하다. 성직자들은 아름다운 구원의 말을 전하면서도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한 일을 일삼고 있었다.
가톨릭은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예수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교황의 권위가 지상의 왕과 같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사의 형식과 영원한 처녀라 주장하는 마리아도 이상하고 인간에게 전하는 고해성사도 예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가톨릭이 지나온 역사는 로마교회의 타락과 많은 사람의 죽음과 교회에서 벌어진 추악한 일들을 보면, 신이 없는 것인지 그들이 다스리는 신이 누구인지 의문이 든다.
로마교회의 타락이 지금의 가톨릭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악한 길을 따라 선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어진다. 만약 가톨릭의 성직자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뿌리와 나무가 범죄한 사실이 명확하다.
물론 이 글을 처음부터 읽은 당신은 안다. 예수가 죽고 지상을 지배한 신이 구약의 여호와 엘로힘이다. 타락한 가톨릭교회 뒤에는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다.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이란 말에는 반박하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가 어둠이고 사탄이라 말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아비가 사탄이고 살인자라 말한 것을 기억하라.
구세주에게 쫓겨난 야훼의 빈 자리를 엘로힘 여호와가 차지한다. 어찌보면 처음부터 엘로힘의 나라이다.
동생 야훼가 형에게서 빼앗은 지상의 이권을 다시 찾은 셈이다.
엘로힘은 강하고 잔혹하다. 역사의 길에 셀 수 없는 죽음을 이를 증명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직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는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교회에서 여자에게 행한 간음은 창녀를 방불케 하고 돈과 권력에 타협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탄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돈과 힘을 얻기 위한 투쟁은 영혼의 구원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가톨릭 교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외면하고 싶겠지만 시간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그 흔적으로 본질을 찾는 교인이 되길 바란다.
성직자와 교회의 타락은 신의 침묵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닮아 벌어진 결과이다.
가톨릭이 이방인들이 가진 독특한 문화를 가진 이유가 그들의 아버지는 엘로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엘로힘은 아버지 나라를 모방하여 자신의 왕국을 통치한다.
어둠세계에 우두머리 통치자자 얄다바오트가 있듯이 가톨릭 교회에도 우두머리 성직자가 있다.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는 자가 있는 이유도 아버지의 세계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엘로힘이 아버지 나라를 모방하여 교회의 기초를 만들었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지상의 다른 신들과 타협하여 탄생한 종교이기에 이방 신을 섬기는 문화가 많이 가미되어있다.
지금의 가톨릭이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정화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신의 도움이 아니라, 혼, 인간의 지성이 육체를 통제하여 생긴 결과물이다.
더 쉽게 말하면, 신의 사악함을 인간의 지성으로 다스리고 이긴 이유이다. 인간의 기원편을 꼭 보길 바란다.
아담이 여호와를 뛰어넘는 경지에 다다를 것이라 말했다. 아담이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타락의 시작이고 원죄라고 배운 당신들에게 묻는다.
피조물 인간이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신을 배신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담이 신을 배반하고 여호와에게 도망친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아담은 스스로가 선악을 아는 신과 같은 경지에 올랐다. 어둠의 신들은 아담을 통제하거나 죽일 수 없었으면 그들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까 두려워하며 에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아낸 사실을 보라.
그 아담과 여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고 그들은 참 아버지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여호와는 그들에게 짐승의 육신을 입히고 보이는 물질의 감옥에 가두었다. 아담이 육체의 인간으로 여호와에게 복종하며 살도록 거짓된 진리를 선포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지금 종교인들이 수많은 탐욕과 정욕을 다스리는 이유는 신의 가호가 아니라 혼의 지성이 육체의 몸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의 타락을 방조한 것은 신이 사탄이고 살인자이기에 가능하다.
지금은 종교인들 사이에 타락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짐승의 육체에 간금된 아담의 후손이 있듯이 육체에 숨어 들은 어둠의 자녀들도 있다. 그런 이유로 죄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을 뿐 죄가 없는 성직자란 말이 아니다.
초대교회나 중세교회에서 벌어진 많은 타락의 행위가 인간의 도덕성 뒤에 숨어서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가톨릭 성직자가 경악하겠지만 더 많은 죄는 우두머리 통치자가 저지른다.
일반 성직자에겐 순교와 도덕성을 강요하고 계급의 낮은 성직자에게 기도와 경건을 가르치지만 모두가 순결한 삶을 살지는 않는다. 그들이 섬기는 존재가 구약의 여호와임을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다.
비참한 종교역사에 예수가 함께 했을 거란 생각이 지금의 모든 오류가 발생했다.
예수는 자기희생과 구원을 위해 치료자로 인간에게 왔다고 말했고 먼저 자신을 희생하며 본을 보였다.
역사를 보면 돈과 권력과 종교적인 이권 전쟁에서 누가 모든 희생을 감당하는가?
삶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건설하는 과정에도 이름 없는 약자가 희생되고 종교적 희생에서도 이름도 없는 성직자가 죽어 나갔다.
약하고 힘없고 역사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희생을 밟고 역사는 흘러왔다.
예수가 다수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라 가르쳤는가?
약자의 죽음은 기억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는가?
모든 것을 왕, 교황, 목사, 부자가 다 가져도 된다고 가르쳤는가?
우두머리 통치자는 항상 희생에 뒷걸음을 친다.
희생을 약자에게 미루는 사람.
자신의 죄를 감추며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
입에서 예수를 증거하며 사람의 섬김을 받는 사람.
이 모두는 예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
종교역사의 잔혹성과 타락은 엘로힘 여호와의 본성을 보여주는 신의 실상이다.
예수가 그들의 구세주였다면 악행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빛은 빛으로 나아오고 어둠은 어둠으로 드러난다.
예수의 이름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죄를 짓는 모든 성직자는 양의 탈을 쓴 이리다. 생명의 영들은 이리를 조심하길 바란다.
가톨릭의 부패와 잔혹한 시간이 흘러 새롭게 등장한 개신교는 어떤 신을 섬기는지 생각해보라.
만약 가톨릭과 기독교가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집안에 전쟁이 일어나 멸망해야 한다.
마가복음 3장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가톨릭에서 섬기는 여호와와 기독교에서 섬기는 여호와는 다른 존재이다.
세상을 창조한 엘로힘 여호와와 종교의 민족을 건설한 야훼 여호와이다.
그럼 같은 형제라 집안 싸움으로 생각하지만 서로 죽기 살기로 덤비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엘로힘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흔히 종교개혁이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한번도 신의 통제에 벗어난 적이 없다. 다만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인간에게 나타나 모를 뿐이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싸운 종교전쟁을 보면서도 그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천국 아버지는 그들이 섬기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참 아버지를 모른 체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고 있다.
종교전쟁의 피를 보고도 사랑, 희생, 공의, 선과 빛으로 이루어진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어둠뿐이다.
오랫동안 벌어진 종교전쟁에 관해 배운 사람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에 관해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개신교의 등장은 한마디로 말하면 부활한 야훼신의 등장이다.
종교를 개혁한다는 표현보다 새로운 종교의 창설이 맞는 표현이다. 개신교는 요한계시록 일부에 등장하는 어린양, 즉, 야훼 신의 부활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한 야훼는 예수의 등장으로 모든 권위를 잃고 죽은 상태로 쫓겨난다.
야훼는 우두머리 통치자 얄다바오트의 둘째 아들인 아벨로 표현된다. (신의 기원편을 참조)
야훼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구세주를 죽여 바친다는 거래로 지상의 이권을 형으로부터 빼앗아 유일신으로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구세주를 죽일 계획이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임을 당한 예수의 모습에서 얄다바오트는 야훼를 부활시켜 재림의 역사를 막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야훼의 희생으로 구세주를 막았고 어둠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믿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 야훼를 부활시켜 지상을 다스리는 신으로 돌려보낸다.
이 말은 쉽게 말해 야훼가 상실된 권위를 다시 세우는 장면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양이 예수라 가르치는 어리석음에 개탄을 한다.
어린양은 죽음을 맞이한 야훼에게 다시 그 나라에서 권위를 부여하고 다른 통치자들에게 야훼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기록이다.
쉽게 말하면 왕이 대신들 앞에서 아들의 수고를 칭찬하고 다시 힘을 실어주려고 마련한 잔치와 같은 것이다. 왕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자리가 혼인잔치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에 다른 내용도 많지만 다음에 이야기한다.
요한계시록은 이 구약 성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는 이유다.
요한계시록이 예수의 재림이 아니라 야훼의 재림이며 그를 섬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을 속이고 구세주 재림을 막으려는 얄다바오트의 의도도 포함되어 사용된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예수의 재림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구세주를 예언으로 구속하지 못한다.
요한계시록에 생명수를 마시고 생명을 얻는 사람이 유대인으로 제한한 이유는 야훼와 함께 구세주를 죽이는데 동참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상으로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일부 이스라엘 사람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했는지 홀로코스트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예언처럼 보이는 장황한 말과 말세를 상징하는 기록이 누구를 항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예언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이 속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11장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라는 표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야훼의 힘이 자신의 울타리에 제한적이다는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얄다바오트는 야훼와 그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세주를 대항하여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올 재림의 역사를 막을 도구로 다시 야훼와 그를 믿는 사람을 부활시킨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의 구약의 모든 형식과 제도를 벗어난 새로운 종교가 나타난 셈이다.
팔레스탄 지역의 한계에 벗어나 전 지구를 항하고, 이스라엘 혈통의 민족을 탈피하여 모든 인간으로 확장된 새로운 종교, 새 예루살렘, 기독교의 탄생이 종교개혁으로 시작된다.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다. 야훼가 부활해도 엘로힘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엘로힘을 소멸시키는 힘은 오직 빛에서 나온다.
엘로힘이 지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얄다바오트도 그를 통제하지 못한다. 가인과 아벨에서 여호와가 가인을 용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가인을 소멸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지구는 엘로힘이고 엘로힘은 지구다. 물과 흙을 통치하는 신이며 인간에게 태양으로 불리운다.
어둠의 세계도 여러 세계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을 다스리는 신들이 있다. 그 세계는 고유한 신들의 영력이며 우두머리 통치자도 그 세계를 없애지 못한다. 다만 얄다바오트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훔쳐 온 힘으로 그들 위에 있는 것이다. 제발 앞의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가톨릭과 기독교의 싸움이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싸움의 확장이며 야곱이 에서의 형의 것을 빼앗는 두 번째 전쟁이다. 출애굽에서 벌어진 애굽과 이스라엘 민족의 처절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과정과 기독교가 정착하는 과정의 역사를 보면 과연 이들에게 예수가 있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당연히 예수는 그들의 싸움과 무관하다. 엘로힘과 부활한 야훼의 싸움에는 어둠만이 존재한다.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모든 학살과 죽음에는 예수의 이름도, 천국 아버지도 없다.
피로 얼룩진 종교를 보면서 평화와 사랑을 운운하는 인간의 무지가 개탄스럽다.
예수가 다시 그대들에게 등장할 것이다.
씨를 뿌렸고 농부에게 농장을 맡기고 떠났고 그 곡식을 거두기 위해 등장할 것이다.
예수의 복음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거짓 진리에 현혹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거짓 진리는 영생을 주지 못하며 구원의 길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다음은 유대인의 학살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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